발표된 수필

을지로 미스 양

칡뫼 2014. 8. 18. 11:32

       

                                      을지로 미스 양

                                                                                                                            

                                                                                                           김 형구

 

       그녀를 만난 것은 지난해 겨울이었다. 그림소재를 찾아 을지로 뒷골목을 거닐 때였다. 진한 주황색 재킷에 검은 단발머리. 예쁘장한 앳된 얼굴. 오른쪽 어깨엔 핸드백을 메고 왼손에는 뭔가를 감싼 빨간 보자기를 들고 있었다. 난 한눈에 커피배달을 하는 아가씨임을 알아차렸다. ‘요즘도 다방이 있나보네.’ 내 앞을 지나치자 진한 향수냄새가 나를 자극했다. 인공의 향기였지만 싫지가 않았다. 

    

       고향에선 풀냄새와 어울리는 오이나 수박 향을 품었던 아가씨였지 않았을까. 웬일인지 나는 그녀를 시골에서 상경한 처녀로 생각하고 있었다. 청바지에 패딩재킷을 한 젊은 차림이었지만 그녀의 뒷모습에는 알 수 없는 쓸쓸함이 배어있었다. 고향의 부모님이 노쇠해서일까? 아니면 형제들 뒷바라지? 그것도 아니면 하는 일이 힘들어서일까? 어쩜 이곳이 재개발 되면 지금의 직장도 없어질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녀에 대한 이런 저런 상상은 끝없이 이어졌다. 

   

       결국 나는 그녀에게 사로잡혔다.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나는 어느새 특별한 이유 없이 그녀를 미스 김도 미스 리도 아닌 '을지로 미스 양'이라 부르고 있었다. 며칠 뒤 일부러 을지로 세운상가에 있는 친구 사무실에 들렀다. 혹시 하는 마음에 배달커피 한 번 먹어보자며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커피를 타준 사람은 미스 양이 아닌 나이 든 아줌마였다. '주변을 한번 뒤져볼까'

 

       얼마나 지났을까. 시간이 흘러도 머릿속을 맴도는 그녀. 결국 밖으로 불러내 그 모습을 스케치 하게 됐다. 이런 저런 모습을 그려보면서 결국 나는 미스 양과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벌써 그녀와의 황홀한 미래를 상상하고 있었다.

        ‘모두가 너를 사랑하게 해줄 게’

그녀를 향한 내 마음을 받아주는 걸까. 그녀도 만족해하는 눈치였다. 그 뒤 난 거의 매일 미스 양을 만났다. 특별한 약속이 있어도 웬만하면 모두 거절했다.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이 좋았다. 커피를 마시며 밤늦도록 이야기도 나누면서 미스 양을 어루만졌다. 머리카락, 어깨, 잘록한 허리 그리고 통통한 엉덩이까지. 가끔은 늘씬한 종아리도.

  

         미스 양이 있는 곳은 을지로, 온갖 종류의 가게가 밀집한 곳이다. 그녀를 찾는 사람은 주변의 가게 사장님들인데 주로 나이가 오육십 대다. 점포용 커피자판기가 있어도 귀한 손님이 오면 미스 양을 부른다. 자리를 비우기 힘든 1인 사장님들이 주 고객인데 젊어서부터 익숙해진 문화를 아직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벌이가 시원치 않아도 출근하면 청소를 마치고 달콤한 모닝 커피와 다방 아가씨의 환한 미소로 소박한 일회성 사치를 즐긴다. 그 순간 진짜 사장님이 된다. 그래야만 하루를 제대로 시작하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을지로 미스 양’이 커피배달을 나섰다. 밖에는 찬바람이 불었다. 주황색 패딩잠바를 걸쳤지만 볼록한 예쁜 가슴을 가릴 수는 없었다. 왼손에 든 빨간 보자기속엔 작은 쟁반 위에 커피 잔, 커피와 크림 그리고 설탕, 뜨거운 물을 담은 보온병이 들어있다. 오른쪽 어깨엔 수금한 커피 값도 넣을 수 있는 핸드백을 걸치고. 꽉 조여지는 청바지 때문인지 엉덩이는 더욱 통통했다. 주변은 온통 잿빛이다. 들여다보면 건물마다 색이 조금은 다르고 가끔은 붉고 밝은 간판도 보이지만 결국 회색 도시일 뿐이다. 무채색 한가운데 한 송이 붉은 꽃 ‘미스 양'이 지나간다. 그 순간은 전봇대며 전깃줄, 건물 간판, 주변의 고층빌딩도 그녀를 위해 존재한다. 멀리 보이는 불빛조차 그녀를 주인공으로 만든다.

  

       그렇지만 나는 검은 머리. 주황색 재킷, 몸에 뿌린 향수보다 그녀의 뒷모습에 깊이 빠졌다. 현실의 어려움 때문일까. 꿈을 향한 고민의 흔적일까. 흐르는 세월의 무심함을 벌써 아는지 그녀의 뒷모습에는 알 수 없는 애잔함이 스며있다. 척박한 도시에 핀 들꽃처럼 열심히 살아가는 그녀. 사랑스럽다. 꼭 안아주고 싶다.

벌써 한 달 째다. 조용한 나만의 방에서 ‘을지로 미스 양'과 은밀한 사랑을 나눈 지도. 그녀를 살며시 보듬어 주는데 방문이 열렸다. 순간.

     "쉬엄쉬엄 하세요, 여기 원마담 커피!"

아내의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나를 멈추게 했다.

     

      화폭에는 진한 향기를 풍기며  ‘을지로 미스 양’이 커피배달을 나가고 있다.